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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6·10만세운동 국가기념일로 지정

남동공단 공장 임대 매매 2020. 12. 9. 11:10

6 10일‘6·10만세운동’국가기념일로 지정

 

6·10만세운동 기념일’ 지정 개정안 128() 국무회의 의결 

 

610 만세운동, 31운동’, 113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

 

 

6 10일이 610만세운동’ 국가기념일로 지정된다. 6·10만세운동은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으로 1919 3·1운동, 1929 11·3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의 무단 통치에 맞선 3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행정안전부(장관 진영) 6·10만세운동 기념일’ 지정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12 8()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6·10만세운동’은 1926 6 10 순종 인산일(장례식) 기해 우리민족이 일제의 강제병합과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밝힌 독립만세 운동이다.

  학생 주도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번져 전국 55개교 동맹휴학으로 이어져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보였다.

  특히, 6·10만세운동’은 대한독립이라는 민족의 공동목표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 거행된 ‘제2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현장에서 2백여 명이 체포됐고 주동자 11명은 실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10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해 관련 단체를 포함한 기관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

  먼저,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회장 라종일) 주관으로 3차례 학술토론을 진행하고, 독립관련 대표단체인 광복회와 함께 국가기념일 지정을 추진해왔다.

  20 국회에서도 당시 정세균 의원 44명이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고, 이번 21대에서도 윤주경 의원 44명이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을 발의한 있다.

행안부는 기관의 요청사항을 검토하고 입법예고 등의 절차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기념행사 주관부처를 국가보훈처로 정하고 610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오는 2021 6 10일은 610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맞는 번째 기념일인만큼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정부기념행사를 의미 있게 거행할 예정이다.

행정안전부는 “이번 기념일 지정을 통해 앞으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재평가되고,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되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붙임 1. 6·10만세운동 기념일 추진경과 1.
2. 6·10만세운동 개요 1.  .    

 

 

 

6·10만세운동 기념일 추진 경과

 

 (18.12.5.) 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 국회 제출

     * 여야의원 44명 공동발의, 정세균 의원 대표 발의
* 20. 5. 29.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됨

  (19.10.15.)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창립 총회

  (20.2.~4.) 관련단체의 국가기념일 지정 요청

    * (기념일 지정 요청) 610만세기념사업회(20.2.5.), 광복회(20.4.6.)

  (18.12.~20.7.) 610만세운동 국가기념일 추진 관련 학술회의 개최(3)

    * (학술회의 개최) 3회 개최(118.12.5., 219.6.10., 320.7.6.)    

  (20.7.14.) 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 국회 제출

     * 여야의원 44명 공동발의, 윤주경 의원 대표발의 

  (20.7.24.)「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개정 요청(보훈처)

  (20.8.~11) 국가기념일 지정 필요성 검토, 각종 심사,「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

    * (입법예고 기간) 20.10.7. ~ 11.16. (40일간)   

  (20.11~12) 법제처 심사완료(20.11.30), 국무회의 의결(20.12.8.)

 

 

6·10만세운동 개요

 

(개요) 순종의 장례일인 1926 6 10일에 일어난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일부가 서로 뜻을 모아 신간회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고, 침체된 민족운동과 학생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31운동과 1929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교량역할을 하였음

   

  (발단) 1926 6 10 순종 황제 인산일을 맞아, 2 31운동을 일으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이자는 뜻의 독립만세운동

  (전개) 서울지역의 학생들이 사전에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6 10 인산 행렬이 지나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200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고 주동자 11명은 실형을 언도 받음

  (확산) 전국 각지의 학생들은 동맹휴학(55개교)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보임. 6·10만세운동은 신간회 설립의 배경이 되었고, 학생 독서회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어 학생들의 의식이 향상되면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날 있는 바탕이 마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