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중반을 넘어서자 미국 해군도 증기기관을 도입하였고, 1853년, 페리 제독에 의한 일본 개항까지 이어졌다. 이 때 페리 제독은 200명의 미 해병대원들을 동반했는데, 당시 해병대원들은 최신 뇌관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물론 92년 후 그 나라의 정복자로 다시 오게 될 운명임을 아는 이는 있을 리 없었다. 이 때 물론 전사자는 없었지만 로버트 윌리엄스Robert Williams 라는 해병대원이 병사하여 요코하마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페리 제독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전 당시는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의 슈리성에 입성하고 석탄저장소를 설치한 바 있었다. 물론 힘으로 밀어부쳐 얻은 결과인데, 92년 후의 후배들은 선배들처럼 무혈입성을 하지는 못했다. 군함이 증기기관화 되어서 수병들의 환경은 개선되었기에 해병대 임무의 비중은 과거의 함내 치안에서 신속파견군 쪽으로 완전히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미 해병대는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에서만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육군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해군과 해병대는 대부분 북쪽에 남았다. 개전 당시에 1,800명 수준에 불과했던 해병대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수십만 대군이 결전을 벌이는 이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할 여지는 없었다. 다만 이 때부터 해병대의 전유물인 적전상륙에 대한 교리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고,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던 존 브라운의 봉기 진압 때 해병대가 출동하였고, 그 유명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때 해병대 군악대가 연주를 맡은 정도였다. 참고로 해병군악대는 대통령을 위해 연주하는 유일한 군악대로 초대 워싱턴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의 취임식 때 연주를 맡는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해병대는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 뉴욕의 폭동진압에도 동원되었고 도미니카 Dominica, 멕시코 Mexico, 니카라과 Nicaragua, 파나마 Panama, 쿠바 등 중남미 일대는 물론 필리핀 Philippines, 대만 臺灣, 중국에도 출동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그들은 적전상륙을 실전으로 치르게 된다. 바로 우리나라의 강화도였는데, 우리에게는 신미양요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1년 6월, 콜로라도 호를 위시한 군함 5척과 맥레인 틸튼 Mclane Tilton 대위가 지휘하는 해병대원 109명을 포함한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 전쟁의 원인을 논함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생략하겠지만 미 해병대는 650명에 달하는 상륙 부대의 선봉을 맡아 맹활약하였다.
그들은 후장식 소총과 신형 야포 등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로 덕진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광성보로 육박했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연 魚在淵이 정예부대인 오군영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지만 수륙양면에서 포격을 받아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 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魚在淳 등 53명 이상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 劉禮俊 등 수십 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어재연 장군을 쓰러뜨린 자는 해병대 소속 제임스 도허티 James Daugherty였다고 한다. 미군은 휴 맥키 해군 Hugh McKee 대위 등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대가로 치렀다. 참고로 미군 측 전과보고는 전사 243명이었다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걸었는데, 장수기는 미 해군 사관학교에 보관되었다가 136년 만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미군은 식수 부족과 기후의 악화, 그리고 조선 정부의 완강한 대화 거부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7월에 작약도를 지나 철수하고 만다. 물론 일본과 마찬가지로 79년 후, 바로 그 바다에서 자신들의 후배들이 수십 배의 규모로 상륙작전을 할 운명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크게 성공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모티브 중 하나가 신미양요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