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구체제)하에서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 민족의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 민족을 거느린 주변 여러 강대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었다.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 미국 독립 전쟁(1775~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관여했다. 이런 전쟁은 프랑스에 절대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 14세(1643~1715)의 만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한 *낭트 칙령의 폐지(1685년)와 그에 따른 위그노(개신교 신자들)의 국외 추방은 그 후의 프랑스 산업 발전을 현저하게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과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제조업이 각지에 출현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 자리에 앉은 중농주의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도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류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모순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앙시앵 레짐)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전쟁(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궁핍에 빠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실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1787년 2월,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안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으로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왕비가 사치를 해 재정의 위기를 가져오게 됐다는 오해를 퍼뜨려 결국 왕비가 1793년 10월 16일 참수형에 처해지는 도화선이 된다.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 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귀족 계층들의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 *위키백과 등 참조
*낭트 칙령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의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화합을 도모하였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를 주었으며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첫 사례로 꼽힌다.
*인클로저
근세 초기의 유럽, 특히 영국에서 영주나 대지주가 목양업(牧羊業)이나 집약 농업을 영위하기 위해 개방 경지나 공동 방목장 등을 사유지(私有地)로 만든 일. 15∼16세기(제1차 인클로저)와 18∼19세기(제2차 인클로저) 두 시기에 걸쳐 영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음. 이로 말미암아 중소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 또는 공업 노동자로 전락하였음.
*길드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 발달된, 상인·수공업자의 특권적 동업자 조합. 11세기에 상업 길드가 성립하고, 12세기에 수공업자 길드가 생겨 도시의 실권을 쥐었으나, 근대 산업의 성립과 함께 쇠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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