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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도 술집이 있었을까?

남동공단 공장 임대 매매 2020. 4. 12. 13:01





아주 옛날에도 술집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 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능신 연못가에서 하백의 세 자녀와 사랑하고자 할 때, 술을 먹고 취해서 큰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부족국가 시대에도 영고,동맹,무천 등과 같은 제천 의식때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단지 이 때 마셨던 술이 어떤 것인지는 알수없다.


술과 함께 등장한 것이 주막이다. 주막은 오늘로 치면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영업집으로서 주막집, 탄막이라고도 했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주막은 경주 천관의 술집이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천관이 술을 파는 집에 다녔는데 그집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하자 자신을 습관적으로 그 집에 태워 간 애마까지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미 주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막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특히 장시가 열리는 곳이나 역이 있는 곳에 주로 자리잡았다. 문옆에 酒라고 표시를 하여 손님을 끌었고 밤에는 그 안에 등을 달아 오가는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주막에서는 보통 음식값 말고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아 잠자는 사람에겐 침구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한 방에서 10여 명이 함께 잤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막도 분화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는 목로주점,내외주점,색주가 등이 생겨났다. 목로주점은 큰 길가보다는 뒷골목 등 동네의 으슥한 곳에 자리잡는 경우가 많았다. 목로의 시설로는 사방이 터진 화덕에 큰 솥을 거는 게 전부였는데, 이 솥에서는 늘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 옆에 주인이 앉아 있고 주인의 뒤에는 안주가 널려 있었다. 목로술집을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술을 마실 때 꼭 서서 마셔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내외주점은 목로술집보다 고급인 술집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그냥 가정집 같지만 대문 옆에 內外酒家라고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두른 간판을 내걸어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알렸다. 내외주점에서는 매운탕 같은 국과 금세 만들기 어려운 안주를 미리 준비해 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래서 일반 가정에 갑자기 손님이 왔는데 안주를 준비할 시간도 없고 목로술집으로 모셔가기에는 실례가 될 때에 내외주점을 찾았다고 한다.


목로술집과 내외주점 모두 오늘날과 달리 안주값은 따로 받지 않고 술값만 받았다. 목로술집은 마신 잔의 숫자대로 계산을 했으며 내외주점은 주전자 수로 계산했다. 내외주점의 손님은 적어도 세 주전자 이상 술을 마셔야 했으며 세 주전자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값을 다 내야 했다. 만일에 세 주전자 이상 마시면 주인이 안주를 하나씩 더 내보내는 등 선심을 쓰기도 했다. 예전에 서울에는 색주가라고 하여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도 있었다. 젊은 여자가 녹의홍상을 차려 입고 목로에 나와 앉아서 아양도 부리고 노래도 하던 음식점이었다.


이러한 색주가는 홍제원에 집단으로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국교가 친밀해지면서 사절의 왕래가 한해에 네다섯 번이나 되었다. 홍제원은 중국으로 가는 연결 도로로서 경치가 좋고 서울에서 10리 이내의 가까운 거리라 환송하고 출영하는 장소로 지정되었다.


사절의 행차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이외에 수행하는 비장,역관 등 모두 수십명이 따랐다. 또 그들에게 딸린 하속(가마꾼,마부,군졸 등)도 수백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사절이 한 번 갈 때면 홍제원 벌판은 별안간 인산인해가 되고 계곡 주변에는 천막이 즐비해졌다. 사절을 비롯해 역관의 천막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기생의 노래와 풍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하속 한 사람이 이렇게 한탄했다. '똑같은 사람이 머나먼 북경 3천리 길을 가는데 이런 차별을 둘 수가 있는가?' 지나가던 정승이 이 말을 듣고 세종에게 건의하여 홍제원에 색주가가 들어서게 된 것이라 한다.


대개 색주가는 안주가 시원치 않았으며, 술도 주전자만 왔다갔다 하고 양도 적게 주는 등 바가지를 많이 씌웠다. 그래서 조심성 있는 사람은 아예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기생 학교가 있어 접대부인 기생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시문과 서화, 음악을 배워 여자로서는 지식층에 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양반을 상대했던 이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웃음을 팔았던 주막의 접대부는 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났다. 글자를 몰라 외상을 줄 때는 나무판에 손님의 특징을 그려 표시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