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식민지정책

'로마 연합'은 다섯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첫째, 연합의 중심인 로마로 모든 주민은 로마 시민권을 갖는다. 그리고 시민의 의무이자 납세의 형식이기도 한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 이들은 투표권을 갖으며 로마의 공직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도 주어진다.
둘째, 라틴족 국가들이다. 원래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같은 이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로마는 과감하게 시민권을 주었다. 이 정도면 동맹이 아니라 합병에 가깝지만 승자인 로마인과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 선 합병이었다.
셋째, 새로 로마 연합에 편입된 나라들로 라틴어를 쓰지 않는 국가들이다. 이들에게 처음엔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이 부여되지만 나중에 라틴어를 익히면 완전한 시민권을 주었다. 실제로 이들은 3년만 지나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된다. 국내의 자치는 완전히 인정되었다.
넷째, 흔히들 속주라고 번역하는 ‘콜로니아’다. 로마인은 카르타고와는 달리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와 군사적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랬기에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진 지역에 로마 시민들을 정착시켰다. 로마의 식민지는 곧 '요새'의 건설이기도 했다. 이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로마 군에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이주한 곳은 로마 식민지, 비로마인이 이주한 지역은 라틴 식민지라 불렸다.
다섯째, 역사에서 통틀어 ‘동맹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다. 이런 동맹국은 로마에게 굴복한 패자였지만, ‘라틴 동맹’처럼 기원전 390년 직후의 패자가 아니라 그보다 뒤인 기원전 350년 이후에 로마와 싸워서 패한 나라들이다. 이들도 완전한 국내 자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그대로 허용되었다. 그 대신 병력 제공이나 군수물자를 제공해야 했으며 로마 시민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 부류에 속한 국가들은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 도시가 많았다.
로마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을 선택했을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든느데, 로마인들은 이런 자신들의 팽창을 영토의 지배라는 차원보다 다른 민족들과 관계가 변화되었다는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로마의 세력 확대는 이탈리아를 크게 변화시켰다. 편리한 로마 가도와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보다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지리적 영역의 차원에서 이탈리아 내 로마 세력의 팽창을 측정하는 것은 여전히 편리한 방법이다. 사실 로마에 패배해 어떤 ‘동맹시’의 형태 속에 들어올 것을 강요당하거나 이를 환영했던 사람들이 담당해야 했던 유일한 의무는 병사들의 식량과 유지비용이었다. 다른 면에서 이들은 로마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즉 로마의 점령군이나 로마가 강제로 만든 정부는 없었다. 로마가 왜 이런 지배 방식을 택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들의 ‘관용성’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특별히 정교하고 전략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로마가 취한 방식은 로마의 위기를 구하는 데에 편리하면서도 이를 운영하기 위해 로마의 행정력과 인력이 필요치 않았다. 동맹세력의 군대는 지역민들이 장비를 공급했고 일부나마 지휘권이 있었다. 로마인들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훨씬 수고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패배시킨 이들을 직접 지배하는 일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 결과는 획기적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로마가 물리친 적들을 확대되는 군사 기구의 일부로 흡수하는 데 효율적인 작동 원리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로마는 동맹세력들에게 로마의 사업에 참가지분을 주었다. 그 지분은 개선식에서 나누는 전리품과 영광 같은 것이다. 일단 로마가 군사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하자, 동맹세력들은 자체적으로 꾸려갈 수 있었고, 이는 고대의 어느 도시도 체계적으로 시행한 적이 없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 승리의 배경이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동원력 이었다.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러 로마인들은 아마도 5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일시에 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서 겨우 5만 명가량을 동원했던 사실, 그 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을 때 동원한 10만 명과 비교해보면 이 동원력은 현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덕분에 로마인은 무적이 되었고, 그들은 전투에는 져도 전쟁에는 지지 않았다. 기원전 130년에 로마의 한 시인이 표현했던 것처럼, “로마 인민은 힘에서 밀리고 전투에서 압도당해도, 모든 것을 건 실제 전쟁에서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런 로마의 저력에 당한 나라는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역시 카르타고였다.